병마
김옥자
평생이 흐르는 동안
너라는 존재를
내게
아무도 묻지 않았다
겨울눈만큼이나 새하얀
옷을 입은 의사가 물었다
언제 왔느냐고
어떻게 어디를 통해 오느냐고
먼 우주에서
이 지구에 떨어져
난생처음 들어본 말에
놀라웠다
이민 온 나그네처럼
땅속에 사는 땅강아지처럼
어둠의 장막 안에 가둬 두었던
말들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고
피가 범람해
가슴은 마구 날뛰었다
이런 날이 이런 날이
오리라곤
한 수저의 음식에 대해,
한 손가락의 동작과 자세에 대해
온 정신을 쏟아부어야 하는 샘물님,
육신에 힘이 되어 줄 영양을 공급하고자
한 끼 식사를 2시간의 씨름으로 치른 후
기진맥진해지고 마는 아이러니를 사는 그녀,
원망하고 원망해도 또 원망스러운 병환,
그녀의 고통은 언제나 저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기를 얼마일까요.
그녀의 50년 삶은 참으로 지난합니다.
그녀의 50년을 버텨온 육신은 이제
굳을 대로 굳었고 해질 대로 해졌습니다.
하여 저에게 그녀는 늘 예수님께서 이르셨던
‘작은 이들 중 가장 작은 이’로 떠올려지고
불행한 이들 중 가장 불행한 이로 파고듭니다.
작은 사람
김옥자
움직이는 상자에 앉아
삿대질하는 이여
나를 아는가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기인(畸人) 주제에 방구석에 쳐박혀 있지 않고
어딜 나 돌아다녀 가만히 살 것이지
나도 당신처럼 숨 쉬는 사람이라네
어찌하여 돌을 던지는가
당신에게 피해준 것 없는데
보이는 것마저 잘못이라면 미안하네
비틀어진 삶을 살아내고 있을 뿐인데
어찌하여 가시를 세우는가
살려고 바둥댄 것이 잘못이라면 미안하네
넋을 놓고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사람 때로는 골칫거리
쓸모없는 사람 때로는 짐 덩어리
작은 사람이지마는
누군가에게 난생처음
소중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
나무 그늘 같은 사람이라고 들었다네
그러나 이제 깨닫습니다.
그녀를 ‘작은 사람’이라 함은 틀렸음을.
누가 그녀를 작은 이라 부르고
그녀의 삶에 불행이란 주홍 글씨를 써 붙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존재 전체, 그 뼛속까지 뒤집어엎으리만치
참혹한 병환에 짓눌려왔지만
그녀는 결코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수 없이 신음하고 눈물은 쏟았지만,
지금도 이따금 재발하는 병의 진행으로
소중한 동작을 잃으며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그 통절한 고통의 강을 건너고
더욱 비좁아진 일상의 삶을 묵묵히 이어갑니다.
더욱 비장해진 시선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기 삶의 안팍을 살핍니다.
이렇게 그녀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소중한 나무 그늘 같음을 일러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글을 써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시를 써왔는지 모릅니다.
1 분에 수십자를 타이프할 손가락도 없이
누에가 지고한 끈기로 아름다운 비단실을 뽑듯
보통 사람이 평생에 걸쳐 쓸 글보다 훨씬 많은 글을
한자 한자 돌판에 새기듯 써왔습니다.
그저 ‘넋을 놓고 살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람에게 전하는 마음
김옥자
당신이 아플 때
떨어지는 꽃잎을 타고서라도
가고 싶습니다
펄펄 끓는 당신의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
강물 위에 떠도는 나뭇잎을 타고서라도
노를 저어 가고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옆자리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둠 속을 헤매일 때
북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서라도
달려가고 싶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란 것을 잊지 말라며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 밖의 세상을 생각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합니다.
이 시의 ‘당신’은 앓고 있는 세상이며
그러한 세상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고,
말없는 곁을 나누고,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파 합니다.
누가 이러한 그녀를 ‘작은 이’라 하겠는지요?
참으로 작은 이들은 세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매몰되어 허덕이는 이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더 갖고자 하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끌려다니는 이들입니다.
자기 밖의 고통을 향한 눈을 진화시키지 못한
두더지같은 이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에 악을 흩뿌리고
본연의 인간성마저 잃어버리는 이들입니다.
그러한 그녀를 이웃으로 둔 우리,
그녀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크고 소중한 선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결코 동정의 눈으로 대할 수 없는 분,
아니, 존경과 사랑이 아닌 그 어떤 시선도
그녀에게 보내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추신:
샘물님께서 새 시집을 내셨습니다.
그분 언어의 세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음을 봅니다.
집 밖에 나갈 수도 없는 분의 상상력이
무한한 영역을 누비며 온갖 것들과 교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이웃들 중 한 사람으로서
삶의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목격합니다.
육체적 온전함이 삶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거저 받은 온갖 것들을
그저 생각없이 소모하다 떠나는 것이
저의 삶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런 걱정에 눈을 뜨라고
샘물님을 이웃으로 보내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