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방콕이다.
나들이를 할 수도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도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똑같다.
그저 어쩌다 한 번 작은 변화를 만들 뿐이다.
사는 지역이 시골시골하다 보니
내가 먹을 만한 메뉴를 파는 곳이 없다.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배달이 안 되고,
거리가 멀어 자차가 있어야 한다.
얼마 전, 우연히 배달을 시작한 죽집을 알게 되었다.
죽집 찜콩
날씨도 과하게 춥지 않아 모처럼 주문을 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닭죽.
단백질 보충이 필요한데 잘 되었다.
어차피 배달비가 들므로 다른 메뉴도 살폈다.
내게는 대부분 강하고 맵다.
밑으로 내려가는데
오~
계란찜이 있었다.
그렇게 닭죽과 계란찜을 받아
죽은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
계란찜은 냉장고 넣으면 수분이 많아서 차디차다.
차가운 걸 먹을 수 없어서 주방에 놓아 두었다가
끼니에 바로 밥반찬으로~
계란찜을 30년 만에 구경 해본다.
미각이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옛날 그 맛인지는 모르겠다.
당근에 파, 똑같으니까 맛도 같겠지?
부드럽다.
그래서 먹기는 수월하다.
아~얼마 만에 먹어보는가!
뭉개지는 부드러움에 감탄했다.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 바라지 않는다..
계란찜은 수분이 많아 위장에 불편함을 일으킨다.
또한 포크로는 쉽게 깨져 버린다.
그래서 굳히기 정도가 적당하게 해야 하는데
조절이 쉽지는 않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반찬으로 안 올린다.
나는 다른 방식의 계란찜을 먹는다.
깨질 염려도 덜하고 수분도 적다.
어제도 들어온 떡으로 특식을 먹었다.
물론 속은 불편을 겪어야 하지만
무얼 먹어도 불편하고 탈이 나는 건 마찬가지다.
더 아프기도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다.
특식조차 하지 않으면
기본식 만으론 너무 힘들다.
그리고 기본에서 벗어난 식단은
조금의 만족감을 안겨준다.
가끔 일어나는 일상의 작은 변화 안에
고통과 불편을 견디어 낸다.
. . . . . . . . . . . . . . .
샘물님의 이번 주 블로그는
소소한 일상의 변화를 그려줍니다.
언제나 방콕인 일상,
답답함을 느끼는 기능을 잃지 않고는
어찌 수십 년의 세월을
한 방에 갇혀 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고통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작은 변화를 시도합니다.
배달이 가능한 죽집을 찾아 메뉴를 들여다봅니다.
닭죽과 30년 만에 맛보는 계란찜
그러나 미각이 집을 나가
30년 전의 그 맛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미각,
식사의 즐거움이 주인을 버리고 떠난 지 오랩니다.
샘물님께는 서서히 침몰하는 범선처럼
빠져나간 채 돌아올 줄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미각과, 청각과,
심한 사시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린
두 눈동자의 촛점까지….
온몸의 관절들 또한 집을 나가버린 지 오랩니다.
그렇게 비어버린 육신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 주고자
새로운 음식을 찾았습니다.
그나마 그것조차 탈의 고통과 함께 배달됐습니다.
향그러운 내음과 함께하는 즐거운 맛,
그것의 댓가로 치러야 할 값은
음식값 몇 배로 비쌉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일상의 영역에 비해 그녀의 일상은
배달받은 계란찜이 담긴 용기만치나 작습니다.
그것을 저 위에 동그란 하늘을 이고 있는
작은 우물 안의 삶이라 할까요?
저에 비해 그녀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은
온종일 나열한다 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 즐기는 것들 전부가 거의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그녀이지만,
제 눈에 그녀의 우물은 비좁고
저 위의 동그란 하늘은 동전만큼이나 작습니다.
우물,
한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이 곧 우물입니다.
상황이 각박하고 험할수록 우물은
작을 수밖에 없겠지요.
시각은 좁아지고
우물 밖 세상에 대한 이해는 몹시 제한됩니다.
또한 한 사람의 이해의 세계는
다른 이의 눈에 비좁은 우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물을 벗어나겠다는 집념도 자칫
또 하나의 우물로 둔갑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물을 벗어났다는 인식은 또 하나의 우물이 되어
자신을 가두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숱한 우물의 함정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 자신의 실존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집착과 애착,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들이 우물이 아닐 수 있기엔
우리에겐 엄청난 수련이 필요합니다.
수도승, 수도사들이 그 길을 가는 자들이겠습니다.
저 같은 소시민은 다만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주어지는 온갖 방법들을 통해
자신이 갖혀 있는 우물의 확장을 도모할 뿐입니다.
그러나 끝내 우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허락될 수 없는 듯합니다.
죽는 날까지.
결국 그녀 삶의 우물의 크기를 재단하려 함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두 권의 시집과 3권 분량의 자서전적 수필집을 낸
그녀의 깊은 영혼이 자리한 우물의 크기를
누가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는지요?
우물의 크기는 결국 우물의 확장을 추구함
그 자체다 싶습니다.
얼마나 지고하고 피땀을 쌓는 노력으로써
확장을 추구했느냐가 곧 우물의 크기입니다.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닌다 해도
동전만큼 작은 하늘 아래 갇혀 살 수도 있으며
온 삶을 작은 방 안에서 산다 해도
온 하늘을 두루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 . . . . . . . . . . . . . .
성탄이 다가오고 올해와의 작별이 다가옵니다.
참 많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저 살아지는대로 살았기에
대부분의 나날들이 망각속으로 숨어들었지만,
‘어느새…’라는 상투적인 말 만큼은
삼가하고 싶습니다.
주어졌던 또 한 해치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 싶기 때문입니다.
365일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듯 살아 이르게 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별 탈 없이 무사했으니 감사롭습니다.
그러나 곧 하느님께서
저의 이 감사를 반기실지 의문스럽습니다.
무탈함에 감사드리기 보다는
작고 보잘 것 없으나 그 속에서 일구어낼 수 있었던
이웃에의 사랑에 감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삶의 알맹이에 대한 감사를
더 즐기시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